CATEGORY

분류 전체보기 (40)

RECENT ARTICLE

RECENT COMMENT

ARCHIVE

LINK



  1. 2007.09.18
    조직의 일원이 된다는 것




내 인생에서 군대의 기억은 어지간해서는 다시 꺼내고 싶지도 않고 어디가서 자랑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종류의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불쑥불쑥 떠오르는 단상이 있는 건 외려 내 의지와 무관하게 깊이 새겨져 있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며 그로인해 내 글은 종종 군시절 에피소드로부터 시작하곤 한다.

자대배치를 받던날, 나와 내 동기가 소속될 소대는 세 내무실에 걸쳐 나누어져 있었고 우리 둘은 각각 그 중 한 곳으로 더플백을 풀게 되어 있었다. 동기녀석이 배치받은 3내무실과 내가 생활하게 될 2내무실의 분위기가 전 중대를 통털어 양 극단에 위치한다는 걸 알게 된건 자대배치를 받고 오래지 않아서였다. 다행히도 내가 있는 곳이 양지였다. 동기놈의 3내무실은 중대 내에서도 내무실 군기가 가장 센 곳으로 통하는 곳이었고, 일체의 웃음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하루가 멀다하고 크고 작은 구타와 얼차려가 있었다. 반면 내가 속한 곳은 벽하나를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어쩌면 그렇게 다를 수 있을까 의아할 정도로 화기애애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작업 중에나 훈련장에서나 식당에서 선임병들 몰래 서로의 생활을 이야기하고 이등병에게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면서 나는 2내무실에 배치된 것이 마냥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남들 다 겪는 그런 이등병 생활을 크게 다르지 않게 보내고.. 어떤 고참들에게는 갈굼도 받고, 어떤 고참들과는 장난도 치고, 시간이 지나 후임병도 생기고 군생활의 요령도 늘고 짬이 차고 어느덧 분대장이 되었다. 어느 군바리가 그리 느끼지 않겠으랴마는, 짬이 좀 된 뒤에 바라보는 부대 내 군기강은 땅에 떨어지다 못해 아예 지구 반대편으로 뚫고 나가려는 기세였고, 정말 군기가 빠져서 그랬던것일까.. 부대에는 늘 이런저런 사고가 그치질 않았다. 2내무실을 제외한 여섯 내무실 전부가 미귀 내지 탈영 등의 이력을 가진 관심사병을 하나씩 보유하게 되었고, 여전히 분위기 좋은 2내무실은 그런 훈훈함과 무사고 이력을 스스로 뿌듯하게 생각하고 그게 다시 밝은 분위기로 피드백하는 선순환을 이루고 있었다.

그 즈음 모두가 예의주시하고 있던 녀석은 변심한 애인 문제로 공중전화를 붙잡고 살기 시작한 3내무실의 한 후임병이었다. 다들 이 녀석이 언제 사고를 터뜨리려나 불안해하고 있을 무렵.. 기어이 휴가를 나갔다가 미귀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헌병들 손에 잡혀들어오고.. 며칠동안인가 군기교육대를 다녀왔다. 그 동안 부대 분위기라고 좋을리 없어 전 중대원이 군장을 꾸려 연병장을 돌며 연대책임의 속죄행위를 하고 영창에서 돌아온 그 녀석이 잔뜩 풀죽은 채 고참들의 갈굼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그 어느날, 중대장이 내린 나름 특단의 조치가.. 이 녀석을 2내무실로 옮기라는 명령이었다.

우리 내무반원들은 불만이 가득했다. 적어도 내무실 차원에서는 구타없는 밝은 분위기와 무사고 전통에 빛나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터에, 사고 이력과 가능성을 지닌 멤버를 받아들이기가 다들 너무 억울했던 것이다. 군기교육대에서 어떤 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녀석은 사고를 저지르기 전에 비해 무척이나 기가 꺾여 있었고 그래서 어쩌면 더 불안해보였고 그런 그를 분대원들은 다정하게 보듬지도 못하고 대놓고 갈구지도 못한 채 냉랭하게 대할 뿐이었다.

나 역시 유쾌할 리 없었다. 전역까지 이제 불과 두달 남짓인데.. 행여 이 놈이 또 무슨 사고를 쳐서 내 뒷통수를 치지는 않을까.. 아.. 왜 말년에 이런 시련이 찾아오나..
일석점호를 앞두고 다들 청소하느라 정신이 없을 무렵, 그 녀석을 데리고 자판기 커피를 한잔씩 뽑아 막사 뒤 체력단련장으로 갔다. 담배를 한대 물려주고, 나도 하나 피워 물면서.. 하루종일 궁리한 대사를 읊기 시작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내용이.. "내가 이등병일 때 어떤 놈이 축구하다가 장파열로 죽었다."로 시작해서, "어떤 놈은 화장실에서 손목을 그었는데 죽지는 않고 어찌어찌됐다, 일병 때 어떤 놈이 소원수리를 써서 다들 개고생을 했는데.. 상병 때 어떤 놈이 사격장에서 자살을 했는데.." 등등 하다가 "이런저런 힘든 순간들을 버텨내고 지금 이 자리까지 잘 생활해 온 나 스스로가 참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나중에 너도 지금 내 위치에 섰을 때, 내가 느끼는 이 뿌듯함과 설레임을 너도 느꼈으면 좋겠다." 하는 식이었다.

마지막 대사를 마칠 즈음.. 이 녀석이 오열하기 시작했다. 시나리오를 쓴 나도 놀랄 정도로 효과가 좋았더랬다. 한번 터지기 시작한 감정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앞으로 사고 안치고 잘 하겠다고, 믿어달라는 흐느낌과 자기고백으로 이어지더니, 그후 녀석은 다시 중대의 일원이 되어 정말 내가 전역하는 날까지 2내무실의 무사고 신화를 이어갔다. 전역 후에 만난 다른 후임병 말로도 잘 지내고 있더라 했다.

...
...
복학하고 졸업하고 취직하고..
직장에서 종종 그 때 그 기억을 떠올린다.

아직 뭘 해야 하는지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신입사원들을 볼 때,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일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을 볼 때, 잘 가르쳐주지 않는 선배 사원을 보며 원망하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볼 때, 밖에 나가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을 귀중한 비법이라도 전수받는 양 귀담아 듣는 모습을 볼 때.. 맞아 나도 저 때는 저랬는데.. 어차피 조직에 적응하고 나면 이 조직의 썩은 곳과 문제점이 더 많이 보이는 것을.. 그 땐 왜 그렇게 빨리 조직의 일원이 되지 못해 불안해했을까.. 늘 조직의 문제점에 대해 뒷담화를 하면서 왜 난 이 조직을 여태 떠나지 못하고 있을까..

그 때 그 녀석에겐 군대라는 조직이 무엇이었을까..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