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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1.30
    강척 회상 (4/4)
  2. 2008.01.30
    강척 회상 (3/4)
  3. 2008.01.30
    강척 회상 (2/4)
  4. 2008.01.30
    강척 회상 (1/4)




0.

아주 어렸을 때는 내가 서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어떤 방향에 대한 인식도 없었고, 사실 그런걸 알아야 할 이유도 없는 거였고.. 단지 주변 이쪽 저쪽에 또래의 친구들이 있을 뿐이었다.

나와 내 또래들이 어느 나이가 되면서부터는 한 쪽을 향해서 뛰어야 했다.
왜 뛰어야 되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채, 그리고 왜 하필 그 쪽으로 뛰어야 되는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뛰어야 했다.

제법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가끔 그런 생각도 했다.
저 놈은 저 앞에서부터 뛰기 시작했으니 덜 힘들겠다.
똑같이 출발했으면 내가 더 잘 뛸 수 있었을텐데..



1.

누가 날 추월하거나, 혹은 내가 멈추어 더 나아가지 않거나 할 때는 막연한, 하지만 극심한 불안을 느꼈고, 돌이켜보건대 군복무 기간 동안, 그리고 강직성 척추염으로 인해 복학이 늦어지는 동안 내가 받은 스트레스와 노이로제는 모조리 그런 맥락에 있었다.

그 많은 불안과 초조는 강직성 척추염 때문에 생겨난 게 아니라, 진작부터 가지고 있던 그 조바심과 부담감이 강척이라는 병을 불러왔으리라.



2.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자신을, 그리고 주변을 돌아본 건 프로작이 내 머릿속에서 일으킨 생화학적 작용도 어느 정도 기능했을 터이지만, 한편으로는 병동 내에서 본 수많은 마이너리티들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가정불화와 부모의 이혼, 학교에서의 집단따돌림 때문에 정신분열증을 앓게 되었던 녀석..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로 고등학교 영어 교사라는 멀쩡한 직업을 갖고도 입원했던 이.. 대학진학에 실패하고 세상에 낙오자로 내던져진 느낌에 자살을 기도했던 아이.. 본드를 끊지 못해, 술을 끊지 못해 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환각을 느끼는 학생들과 아저씨.. 대화하다가 상대방을 향해 욕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강박증을 가져 병동 내에서 늘 싸움을 일으키던 이..

뛰고 있는 동안에는 같이 뛰는 주변 사람들 밖에 보질 못 했는데.. 세상에는 그런 뜀박질을 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란 걸 그제서야 새삼스레 느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보며 느낀 제일 먼저의 감정은 참으로 간사하게도 측은지심이기에 앞서 나보다 뒤에 있는 이들이 많이 있구나 하는 일종의 안도감이었음을, 약자에 대한 배려는 그 다음이었음을.. 고백한다.

진작에 뜀박질을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고, 아예 뛸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거였고, 다른 어떤 세상에는 뛸 필요도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었고.. 아니 그런 생각 이전에.. 왜, 무엇을 위해서 뛰는지에 대해서.. 누가 뛰기를 강요하는지.. 그런 것들을 나 혼자의 힘으로 통찰할만큼 총명하지는 못했었고, 그래서 그런 스트레스와 노이로제 속에 지쳤던 것이고.. 기어이 특수한 환경에 가서야 천천히 곱씹어볼 수 있었던 무렵이었다.



3.

뭐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지만서도, 그렇게 조금씩 마음의 병을 추스리고, 강척을 다스리고.. 천천히.. 다시 뜀박질을 시작하게 됐다. 천천히. 재발해서 다시 심해졌던 때도 있었지만 MTX 대신 엔브렐이라는 주사제를 쓰면서 강척은 거의 완치되다시피 좋아졌다.
복학을 하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딸 서연이가 태어난지 이제 한달 보름 남짓 된다.
나를, 그리고 집사람을 닮은 아이의 웃고 울고 젖을 물고 자는 모습을 보며 이 이상의 행복이 또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4.

때로 뜀박질은 격해져서 나도 모르게 다시 스트레스와 노이로제를 향해 달려가곤 한다.
그럴 땐 주변을 바라보는 시야와 사고의 폭이 다시 좁아지는데, 고과, 연봉, 자동차, 아파트, 해외여행, 펀드.. 그런 것들이 나에게 주는 스트레스는 곧 남들만큼 가지지 못한데서 오는 초조함과 상실감인데, 그런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질 땐 스스로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걸고 행복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예전 그 심리검사의 기억이 떠오를 때도 있고, 입원해 있던 동안 마주쳤던 여러 군상들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천천히 주변을 더 멀리 둘러보고 뒤도 한번 돌아보려고 한다.

나는 지금 내가 가진 것들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지, 아니면 다른 이들과의 비교 우위에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지.. 나는 지금 행복해지기 위해 뛰고 있는지, 혹시 뛰는 이유를 망각한 채 뛰는 그 자체에 파묻히지는 않았는지..

...

2008년 1월.




And




0.

의사는 입원을 권했고, 정신과 병동은 개방병동과 폐쇄병동이 있는데 치료의 효과는 폐쇄병동이 훨씬 좋다 했다.
폐쇄병동은 두개의 철문으로 건물 내 다른 병실과 격리되어 있었고, 식사가 들어오거나 할 때는 바깥쪽 철문을 열고 들어와서 안쪽 철문을 열기 전에 바깥쪽 문부터 잠그고, 안쪽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서 다시 잠그는 식의.. 말 그대로 외부로부터 폐쇄된 공간이었다. 병원 바깥에서도 쉽게 찾을 수가 있었는데, 창문에 쇠창살이 쳐져 있는 층이 바로 그곳이었다.

내가 입원했을 때 먼저 생활하고 있던 그곳의 다른 환자들은 이미 나를 나이롱 환자로 간주하고 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두 발로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심각한 분열증이나 강박증을 가진 환자도 있었고, 거식증으로 비쩍 마른이도 있었고, 본드를 끊지 못해 들어온 고딩들이나.. 이유는 모르지만 자살기도 후에 들어온 아가씨도 있었고.. 하여간 여러 종류의 환자들이 있었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본인의 의지가 아닌 가족과 보호자의 뜻에 의해 강제로 들어와 있다는 점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나가려는 시도를 하다가 구속복을 입고 독방에 하루이틀 갇힌 뒤에야 포기하고 조용히 지내게 되는 이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그들이 보기에 칫솔이며 슬리퍼에 읽을 책까지 챙겨 제발로 걸어 들어온 나는 뭔가 복잡한 현실을 도피해서 잠시 쉬러 들어온 가짜 환자였던 셈이다.



1.

의사가 나에게 폐쇄병동을 강력추천했던 이유는 나에게서 어떤 종류의 집착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당시 나는 복학을 제 때 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영영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노이로제가 된 상태였고, 더 늦어져서는 안된다는 절박함 때문에 더더욱 현실과의 끈을 놓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작  폐쇄병동에 입원하기로 결심했으면서 어처구니없게도 삐삐를 가지고 들어가서 압수당하기까지 했으니..



2.

입원 초기에 받았던 여러가지 검사들 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검사가 하나 있다.

검사의 이름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종의 심리검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두명의 사람 또는 풍경이 있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나보고 그 상황에 맞추어 이야기를 지어내보라는 것이었다.

저 남자랑 저 여자는 원래 여차저차한 관계였는데 지금 저 장면은 이러쿵 저러쿵 해서 어쩌구 저쩌구 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어 대답하고 나면, 검사자는 그 그림을 내리고 그 뒤에 가려져 있던 다른 그림을 보여주고, 나는 다시 새 이야기를 만들어서 답해주고..

몇장의 그림을 설명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앞선 그림의 이야기와 나중 그림의 이야기를 연결해서  스토리가 구성되게 하고 있었다. 이들은 앞에서 봤던 그림 속 그 여자의 부모인데, 어쩌구 저쩌구..

우울증이 심했다면 앞뒤 이야기가 연결되건 말건 심드렁하게 대충 지어내고 말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나는 내 발로 걸어들어간만큼 치료받고자 하는 의지는 있었고, 검사에 최대한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었다. 더욱이 나는 그런 종류의 검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짱구를 굴려볼 여지도 없이 시키는대로 열심히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나도 모르는 새에 나는 이야기를 열심히 만들어 내고 있었고..
한 일고여덟장 쯤 했을까.. 검사자가 말하길, "자 , 이제 마지막 그림입니다. 지금까지처럼 그림 속 상황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설명해주세요." 하면서 앞서 설명한 그림을 내리고 마지막 도화지를 보여주었다.

그건 백지였다.



3.

어.. 이거 아무 그림도 없는데요.. 이런 말조차 필요없었다.
검사자였던 그 아가씨도 나에게 백지를 보여줄 뿐 아무런 지시나 요구도 없었고, 둘다 아무말 하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나는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무 그림없는 빈 도화지였지만 나는 앞에서 본 그 어떤 그림보다 자세하게 묘사를 하고 있었고, 앞의 그림들에 등장했던 남자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주저리주저리 토해내고 있었다.

그 남자는 나였고, 그렇다고 말은 안했어도 검사자도 그걸 알고 있었고, 검사자가 그걸 안다는 것을 나 역시 알고 있었다. 검사자 앞에서 실한오라기 걸치지 않은 채 무장해제 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나는 그렇게 그 남자를 통해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
그 남자는 그의 인생을 Reset 하고 싶어했다.



4.

내가 우는 소리가 바깥으로 들렸는지, 출입문에 붙은 작은 유리 사이로 내 우는 모습이 보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른 환자들이 늘 보아오던 정신과 의사 외에 처음보는 다른과 의사가 와서 검사를 하고 간 때문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애시당초 내가 나이롱이든 진짜 환자든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다른 환자들도 나를 완전 쌩나이롱은 아닌 정도까지 인정했고, 몇가지 심리검사가 더 있었고.. 프로작과 몇몇 알약들과 함께 정신과 병동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And




0.

1997년 5월의 어느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거짓말처럼 왼쪽 발목이 디디지도 못할 정도로 새큰거렸다.
전날 술먹고 들어오다 발을 삐끗했겠거니, 또 필름이 끊어졌나, 술 좀 줄이고 이제 건실하게 살아보자..
쉽게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오래갔다.
동네 정형외과에 갔다가 류마티스 진단을 받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오진이었다.

두달이 채 못돼서 염증은 오른쪽 발목에 이어 양 무릎까지 번졌고, 통증은 점점 심해지는데다 급기야 나 혼자서는 걷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더니, 염증이 골반쪽까지 올라오고 나서는 몸을 뒤집는 것조차 내 의지대로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누운채로 몸을 옆으로 돌려 깡통에 소변을 봐야했고..



1.

K박사가 아직 원장이던 당시.. 예약하면 초진 받기까지 3~4년을 기다려야 한다던 H대학 병원 류마티스 내과를 어찌어찌 연줄을 동원하여 급하게 찾아가서야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나마 초기에 발견해서 아직 관절의 강직이 시작된 것은 아니고, 내 경우엔 병의 증상 자체도 척추 강직보다는 말단 관절의 염증이 더 먼저 나타난 것이라 했다.

퉁퉁 부은 무릎 관절 속으로 바늘을 꽂아 굵은 주사기 여섯개 분량의 염증을 뽑아내고.. 무릎과 발목에 스테로이드를 주사하고.. 알약으로 된 스테로이드와 살라조피린, 그리고 MTX라는 약을 처방받고.. 그렇게 퇴원해서는 하루종일 집안에서 보내는 생활이 시작됐다.

하필 그 때는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가을 학기엔 복학할 예정이었던, 그럴 무렵이었는데, 이놈의 무릎은 조금만 돌아다녀도 염증이 생겨 며칠을 누워서 꼼짝 안하고 지내야 했고, 결국 어떻게든 그 해에 복학하려던 계획은 포기해야 했다.



2.

몸이 아픈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정작 미치고 환장할 노릇은 방구석에 쳐박혀 세상 돌아가는 걸 그저 구경만 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뭔가 분주하게 약속이 많은 스무살의 설레임 언저리에 있는 청춘들은 삐삐와 핸드폰 덕분에 만날 사람도, 만나서 해야 할 일도 많았고, 아직 IMF 사태가 닥치지는 않았을 때였던지라 개나 소나 외국으로 나갔다 오는게 유행처럼 되어가고 있었고, 여자 동기들은 사회초년생 특유의 오바스런 직장인 티를 내면서 제법 화장이 능숙해져 가던..

따지고 보면 군생활 내내 시간이 아깝고 그래서 더 초조하고 그랬던 것도, 급변하는 세상이 날 기다려주지 않고 혼자 정체되어 있는 것 같은 막막한 느낌 때문이었고, 그래서 제대하고 나서 그걸 따라잡겠다고 학원이며, 아르바이트며..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기라도 할 듯한 기세로 덤벼들었던건데, 그 모든 계획과 의욕이 틀어지면서 그 때 가진 욕심과 열의만큼, 어쩌면 그 이상 나는 좌절했었더랬다.

불과 1년 늦춰진 것 뿐인데..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추스르려 한 적도 없지 않았지만 그 다음해에는 멀쩡한 몸으로 복학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와 의심으로 고민과 걱정이 더 많았고, 다들 각자의 생활에 바빠 연락이 뜸해지는 친구들을 향한 피해망상과, 길에서 만난 고등학교 친구조차 알아보질 못할 정도로 변해버린 내 외모는 대인기피로 이어졌고,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누적되기를 1년여.



3.

턱관절에 생긴 염증 때문에 공황장애를 겪고 나서
나는 정신병원으로 향했다.




And




강척

강직성 척추염 (Ankylosing spondylitis).
 - ankylose : (관절을) 강직시키다.
 - spondylitis : 척추염. (spondyl- : 척추의~)

골반 바로 위에 위치하는 천골 주변 조직에 염증이 생겨 점차 척추관절 마디가 서로 융화된 상태로 굳는 병. 관절의 강직이 완료되면 천골 근처의 척추뼈가 하나의 통뼈로 굳어 굽히거나 펴지 못하는 상태가 됨.
척추 외에 고관절, 무릎, 발목, 늑골, 어깨, 목 등에도 염증과 통증이 있을 수 있고, 초기 증상은 디스크와 달리 아침과 밤에 관절의 뻣뻣함이 심하고 활동을 하는 동안 점차 통증이 누그러짐.
혈액 검사 시, HLA-B27이라는 백혈구 항원이 있을 경우 이 병을 의심해 볼 수 있으나 HLA-B27 항원이 있다고 해서 모두 발병하는 것은 아님.
정확한 발병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고, 대개 자가면역체계의 이상으로 추정. 즉, 왜 이 병에 걸리는지 잘 모른다는 뜻.
스테로이드, 설파살라진, MTX, 레미케이드, 엔브렐 등의 약물로 치료.

환우회
KOAS
KASCO





1997년 5월, 이 병이 나에게 찾아왔다.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