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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아주 어렸을 때는 내가 서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어떤 방향에 대한 인식도 없었고, 사실 그런걸 알아야 할 이유도 없는 거였고.. 단지 주변 이쪽 저쪽에 또래의 친구들이 있을 뿐이었다.

나와 내 또래들이 어느 나이가 되면서부터는 한 쪽을 향해서 뛰어야 했다.
왜 뛰어야 되는지도 정확히 모르는 채, 그리고 왜 하필 그 쪽으로 뛰어야 되는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뛰어야 했다.

제법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가끔 그런 생각도 했다.
저 놈은 저 앞에서부터 뛰기 시작했으니 덜 힘들겠다.
똑같이 출발했으면 내가 더 잘 뛸 수 있었을텐데..



1.

누가 날 추월하거나, 혹은 내가 멈추어 더 나아가지 않거나 할 때는 막연한, 하지만 극심한 불안을 느꼈고, 돌이켜보건대 군복무 기간 동안, 그리고 강직성 척추염으로 인해 복학이 늦어지는 동안 내가 받은 스트레스와 노이로제는 모조리 그런 맥락에 있었다.

그 많은 불안과 초조는 강직성 척추염 때문에 생겨난 게 아니라, 진작부터 가지고 있던 그 조바심과 부담감이 강척이라는 병을 불러왔으리라.



2.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자신을, 그리고 주변을 돌아본 건 프로작이 내 머릿속에서 일으킨 생화학적 작용도 어느 정도 기능했을 터이지만, 한편으로는 병동 내에서 본 수많은 마이너리티들의 모습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가정불화와 부모의 이혼, 학교에서의 집단따돌림 때문에 정신분열증을 앓게 되었던 녀석..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로 고등학교 영어 교사라는 멀쩡한 직업을 갖고도 입원했던 이.. 대학진학에 실패하고 세상에 낙오자로 내던져진 느낌에 자살을 기도했던 아이.. 본드를 끊지 못해, 술을 끊지 못해 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환각을 느끼는 학생들과 아저씨.. 대화하다가 상대방을 향해 욕을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강박증을 가져 병동 내에서 늘 싸움을 일으키던 이..

뛰고 있는 동안에는 같이 뛰는 주변 사람들 밖에 보질 못 했는데.. 세상에는 그런 뜀박질을 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란 걸 그제서야 새삼스레 느꼈던 모양이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보며 느낀 제일 먼저의 감정은 참으로 간사하게도 측은지심이기에 앞서 나보다 뒤에 있는 이들이 많이 있구나 하는 일종의 안도감이었음을, 약자에 대한 배려는 그 다음이었음을.. 고백한다.

진작에 뜀박질을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고, 아예 뛸 수 없는 사람도 있는 거였고, 다른 어떤 세상에는 뛸 필요도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었고.. 아니 그런 생각 이전에.. 왜, 무엇을 위해서 뛰는지에 대해서.. 누가 뛰기를 강요하는지.. 그런 것들을 나 혼자의 힘으로 통찰할만큼 총명하지는 못했었고, 그래서 그런 스트레스와 노이로제 속에 지쳤던 것이고.. 기어이 특수한 환경에 가서야 천천히 곱씹어볼 수 있었던 무렵이었다.



3.

뭐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건 아니지만서도, 그렇게 조금씩 마음의 병을 추스리고, 강척을 다스리고.. 천천히.. 다시 뜀박질을 시작하게 됐다. 천천히. 재발해서 다시 심해졌던 때도 있었지만 MTX 대신 엔브렐이라는 주사제를 쓰면서 강척은 거의 완치되다시피 좋아졌다.
복학을 하고,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딸 서연이가 태어난지 이제 한달 보름 남짓 된다.
나를, 그리고 집사람을 닮은 아이의 웃고 울고 젖을 물고 자는 모습을 보며 이 이상의 행복이 또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4.

때로 뜀박질은 격해져서 나도 모르게 다시 스트레스와 노이로제를 향해 달려가곤 한다.
그럴 땐 주변을 바라보는 시야와 사고의 폭이 다시 좁아지는데, 고과, 연봉, 자동차, 아파트, 해외여행, 펀드.. 그런 것들이 나에게 주는 스트레스는 곧 남들만큼 가지지 못한데서 오는 초조함과 상실감인데, 그런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질 땐 스스로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걸고 행복이란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예전 그 심리검사의 기억이 떠오를 때도 있고, 입원해 있던 동안 마주쳤던 여러 군상들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천천히 주변을 더 멀리 둘러보고 뒤도 한번 돌아보려고 한다.

나는 지금 내가 가진 것들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지, 아니면 다른 이들과의 비교 우위에 있어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지.. 나는 지금 행복해지기 위해 뛰고 있는지, 혹시 뛰는 이유를 망각한 채 뛰는 그 자체에 파묻히지는 않았는지..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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