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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의사는 입원을 권했고, 정신과 병동은 개방병동과 폐쇄병동이 있는데 치료의 효과는 폐쇄병동이 훨씬 좋다 했다.
폐쇄병동은 두개의 철문으로 건물 내 다른 병실과 격리되어 있었고, 식사가 들어오거나 할 때는 바깥쪽 철문을 열고 들어와서 안쪽 철문을 열기 전에 바깥쪽 문부터 잠그고, 안쪽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서 다시 잠그는 식의.. 말 그대로 외부로부터 폐쇄된 공간이었다. 병원 바깥에서도 쉽게 찾을 수가 있었는데, 창문에 쇠창살이 쳐져 있는 층이 바로 그곳이었다.

내가 입원했을 때 먼저 생활하고 있던 그곳의 다른 환자들은 이미 나를 나이롱 환자로 간주하고 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내가 두 발로 걸어 들어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심각한 분열증이나 강박증을 가진 환자도 있었고, 거식증으로 비쩍 마른이도 있었고, 본드를 끊지 못해 들어온 고딩들이나.. 이유는 모르지만 자살기도 후에 들어온 아가씨도 있었고.. 하여간 여러 종류의 환자들이 있었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본인의 의지가 아닌 가족과 보호자의 뜻에 의해 강제로 들어와 있다는 점이었고, 그들 대부분은 나가려는 시도를 하다가 구속복을 입고 독방에 하루이틀 갇힌 뒤에야 포기하고 조용히 지내게 되는 이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그들이 보기에 칫솔이며 슬리퍼에 읽을 책까지 챙겨 제발로 걸어 들어온 나는 뭔가 복잡한 현실을 도피해서 잠시 쉬러 들어온 가짜 환자였던 셈이다.



1.

의사가 나에게 폐쇄병동을 강력추천했던 이유는 나에게서 어떤 종류의 집착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당시 나는 복학을 제 때 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영영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노이로제가 된 상태였고, 더 늦어져서는 안된다는 절박함 때문에 더더욱 현실과의 끈을 놓칠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작  폐쇄병동에 입원하기로 결심했으면서 어처구니없게도 삐삐를 가지고 들어가서 압수당하기까지 했으니..



2.

입원 초기에 받았던 여러가지 검사들 중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검사가 하나 있다.

검사의 이름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종의 심리검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두명의 사람 또는 풍경이 있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나보고 그 상황에 맞추어 이야기를 지어내보라는 것이었다.

저 남자랑 저 여자는 원래 여차저차한 관계였는데 지금 저 장면은 이러쿵 저러쿵 해서 어쩌구 저쩌구 하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어 대답하고 나면, 검사자는 그 그림을 내리고 그 뒤에 가려져 있던 다른 그림을 보여주고, 나는 다시 새 이야기를 만들어서 답해주고..

몇장의 그림을 설명하다보니 나도 모르게 앞선 그림의 이야기와 나중 그림의 이야기를 연결해서  스토리가 구성되게 하고 있었다. 이들은 앞에서 봤던 그림 속 그 여자의 부모인데, 어쩌구 저쩌구..

우울증이 심했다면 앞뒤 이야기가 연결되건 말건 심드렁하게 대충 지어내고 말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나는 내 발로 걸어들어간만큼 치료받고자 하는 의지는 있었고, 검사에 최대한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있었다. 더욱이 나는 그런 종류의 검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짱구를 굴려볼 여지도 없이 시키는대로 열심히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 나도 모르는 새에 나는 이야기를 열심히 만들어 내고 있었고..
한 일고여덟장 쯤 했을까.. 검사자가 말하길, "자 , 이제 마지막 그림입니다. 지금까지처럼 그림 속 상황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설명해주세요." 하면서 앞서 설명한 그림을 내리고 마지막 도화지를 보여주었다.

그건 백지였다.



3.

어.. 이거 아무 그림도 없는데요.. 이런 말조차 필요없었다.
검사자였던 그 아가씨도 나에게 백지를 보여줄 뿐 아무런 지시나 요구도 없었고, 둘다 아무말 하지 않았지만 나는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나는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무 그림없는 빈 도화지였지만 나는 앞에서 본 그 어떤 그림보다 자세하게 묘사를 하고 있었고, 앞의 그림들에 등장했던 남자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주저리주저리 토해내고 있었다.

그 남자는 나였고, 그렇다고 말은 안했어도 검사자도 그걸 알고 있었고, 검사자가 그걸 안다는 것을 나 역시 알고 있었다. 검사자 앞에서 실한오라기 걸치지 않은 채 무장해제 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나는 그렇게 그 남자를 통해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아...
그 남자는 그의 인생을 Reset 하고 싶어했다.



4.

내가 우는 소리가 바깥으로 들렸는지, 출입문에 붙은 작은 유리 사이로 내 우는 모습이 보였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른 환자들이 늘 보아오던 정신과 의사 외에 처음보는 다른과 의사가 와서 검사를 하고 간 때문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애시당초 내가 나이롱이든 진짜 환자든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다른 환자들도 나를 완전 쌩나이롱은 아닌 정도까지 인정했고, 몇가지 심리검사가 더 있었고.. 프로작과 몇몇 알약들과 함께 정신과 병동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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