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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2.16
    숭례문, 조선, 유교 그리고 어른 2




0.

영화 "분노의 역류"에서 진범은 소방 예산이 줄어드는 데 대한 불만을 가진 동료 소방대원이었더랬다.
숭례문 화재 속보를 보다가 잠깐 그런 상상도 해봤다. 부실한 문화재 관리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누군가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한 건 아닐까.

웬걸.. 범인으로 잡힌 70대 노인은 토지보상금에 대한 불만 때문에 그랬다 하며,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에게 미안하다는, 숭례문은 다시 복원하면 된다는 말을 했다.
아..


1.

숭례문이 전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상실감과 동시에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꼈던 건, 정작 나 자신이 숭례문에 대해 가진 지식이 전무하다는 사실이었다.
국보1호라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그 건축물이 국보로 지정될 만한 어떤 의의와 가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외국인에게 숭례문에 대해 관광 가이드를 해야 하는 상황을 가정한다면 내가 가진 지식은 이씨조선왕조의 도읍을 둘러싼 성의 남쪽 문이라는 사실 외에 더 할 얘기가 없는 수준인 것이었다.

불타버린 잔해를 바라보며 드는 안타깝고 처참한 마음과 모순되지만, 사실 화재가 나기 전 그 주위를 숱하게 돌아다닐 때에도 정작 그곳에 있는 것이 문화유산이라는 의식은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에둘러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솔직해지자. 별 애착을 느끼지 못했던 게 맞다.


2.

왜 그런가.. 돌아보면 나 스스로는 유교에 대한 개인적 반감과 숭례문이 그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선택한 조선왕조 시기의 상징적 건축물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진단한다.

공자의 유교가 주자에 이르러 어떻게 완성되었는지, 조선 땅에서 이룬 학문적 성과, 주리론이니 주기론이니, 사단칠정 따위를 다 이해하고 하는 소리는 물론 아니다.
학문으로서, 철학으로서의 유교는 사실 공부해야 할 부분이 많다는 생각은 하지만, 실생활에서 철학과 사상이 아닌 격식과 예의 형태로 이런저런 부분을 구속하고 강요하는 모습은 완전 질색인데, 특히 조선시대도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유교적 관념에서 파생한 불합리한 관습이 휘두르는 폭력을 볼 때 그러했다.

그게 유교의 본질은 아닐 터이나 가장 질색인 것이 "장유유서"다.
나더러 장유유서라는 단어를 새로이 정의하라면, 나이값 못하는 어른이 출생 시기에 의해 자연적으로 획득된 권위를 휘두르며 똥고집을 피우거나 합리적인 의견을 짓밟으며 사욕을 도모하는 것. 이라 하겠다.

나이들어 힘없고 외로운 노인들을 배려하고 돌보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약자이기 때문이지 어른이기 때문이 아닌 것이며, 그런 관점에서 보면 극빈층과 소년소녀가장인 아이들, 장애인을 배려하고 보호해야 하는 이유와 동일한 것이지 단지 나이가 많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장유유서"를 합리화 하는 근거가 어른들의 연륜에서 체득하고 축적된 "지혜"라면, 그런 "지혜"가 없이 그저 나이만 먹은 이들은 어떡할 것인가.

조선왕조는 바로 그 유교라는 사상적 배경이 통치이념자 생활규범이 되었던 시대였지만 과연 지금은 어떤한가.


3.

이념에 따라 붕당으로 나뉘고 관념과 허상에 빠져 격식만 강조하던 보습을 보며 왜 우리 선조들은 좀 더 실질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왔다.
강산이 수십번 바뀌어 2008년 현재는 철학과 사유는 간데 없고 온통 "실용" 천지다.

불을 지른 이유도 토지보상금에 대한 불만 때문이고, 대운하를 파헤치건 말건 내 아파트 가격이 떨어질지도 모르니 좌빨은 뽑아서는 안되는 것이며, 영어 몰입 교육을 해야 하는 것도 그래야 경쟁력이 생기기 때문이란다.

그 "실용"이란 것은 아마도 "물욕"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이념인 모양이다.
너무 관념 속에 허우적거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아무런 철학적 소양 없이 실용을 외치다가는 딱 지금의 모습이 되는 것 같다.


4.

돈이 곧 철학인 이들이 어른 행세를 하려고 하니 당최 이 나라에는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

불을 지른 그 70대 노인은 그 모든 걸 한꺼번에 보여줬다.
토지 보상금을 향한 노욕과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는 그 어른의 지혜, 그리고 다시 지으면 된다는 그 척박한 정신세계..


5.

숭례문이 불타 사라지고 없다는 사실은, 유교며 조선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것과 상관없이 단지 오래된 그 무언가를 잃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사람은 그럴 수 없다. 아무리 오래되어봤자 100년 채우기가 쉽지 않고, 무엇보다 희소가치가 없다.
오래되어 사라졌을 때 많은 이들에게 마땅히 가슴 아프고 슬픈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단지 좀 오래 살았다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데 그렇다고 부족한 그게 아마도 돈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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